당신은 자신의의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의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의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의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의 저자는 계속해서 히브리 신자들에게 그들의 영적 '안식'을 자극합니다.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 께서 그의 일에서하신 것처럼 그 자신도 그의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같은 불순종의 모범에 따라 넘어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강력하며 어떤 양날의 칼보다 날카 롭고 영혼과 영, 관절과 골수까지 꿰뚫고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에 숨겨져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그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 벗고 열려 있습니다.” (히브리서 4 : 10-13)

구원의 대가로 우리가 하나님의 식탁에 가져올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의 로울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의를 '입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스라엘이 구원 받기를 바라며 하나님 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지만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의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의를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의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사람의의를위한 법의 끝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 : 1-4)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은혜로만 믿음을 통한 구원의 단순한 메시지는 개신교 종교 개혁의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해서이 메시지에 다른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위의 히브리서에서 말했듯이, '안식에 들어간 사람도 하나님 께서 그 분에게서하신 것처럼 자신의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분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를 위해하신 일을 받아 들일 때, 우리는 다른 수단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노력을 그만 둡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부지런하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왜?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한 구원은 우리의 타락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얻은 것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이방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로움, 심지어는 믿음의의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추구했지만 의의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믿음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기록 된대로 : '보라, 내가 걸림돌과 범죄의 반석을 시온에 놓았으니,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9 : 30-3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강하며' '양날의 칼보다 날카 롭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과 영혼을 나누는 지점까지 '꿰뚫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에 대한 '분별 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우리'를 드러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으며 때로는 매우 고통 스럽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기기만,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에게서 숨은 피조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으며 놀라운 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계속 사랑 하시는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적 안식에 들어갔습니까?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하나님 께 설명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 덮여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의 선함과 선행을 간청 할 계획입니까?